황희 오점 위기 최종
황희 연표
황희 스캔들이란?
오점과 위기 👇
황희의 오점과 실수, 위기 정리: 명재상에게도 오점과 위기는 있었습니다. 황희 스캔들은 무엇이었을까요?
1. 사위 서달 사건(서달 살인사건 은폐 및 청탁)
- 1427년(세종 9년),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고을 아전을 구타해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.
- 황희는 동료 정승 맹사성에게 사건 무마를 청탁했고, 실제로 사건이 축소·은폐되는 듯했으나 세종의 지시로 진상이 드러나 파직 및 투옥됨.
- 이 사건에는 황희뿐 아니라 우의정 맹사성, 형조판서 서선 등도 연루되어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켰음.
- 불과 7일 만에 세종의 신임으로 복직되었으나, 황희의 권력 남용과 가족 비호, 직권 남용 논란의 대표적 사례로 남음.
2. 양녕대군 폐위 반대 및 유배
- 태종 시절,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며 "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우면 재앙이 온다"는 원칙론을 주장.
- 태종의 뜻과 어긋나면서 결국 삭탈관직 및 남원 유배라는 정치적 위기를 맞음.
- 양녕대군 폐위 이후 황희의 발언이 재차 문제시되어 태종의 분노를 샀고, 서울 근처에 두지 말라는 명령까지 받음.
- 이후 세종 즉위 후 복직.
3. 인사 청탁 및 매관매직, 뇌물 수수 논란
- 황희는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친한 사람을 주로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음.
- 매관매직(관직 매매), 형옥을 팔아 뇌물을 챙겼다는 비난도 실록에 기록됨.
- 대사헌 재직 중에는 뇌물을 많이 받아 ‘황금대사헌’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음.
- 세종 7년, 남원부사로부터 유지(油紙)로 만든 안롱(가마 덮개)을 받았다가 자수한 일도 있음.
4. 가족 비리 및 사적 청탁
- 아들 황보신이 죄를 지어 국가 전답(과전)이 몰수될 위기에 처하자, 장남 황치신과 밭을 맞바꾸게 했고, 본인 과전과 바꿔달라는 상소까지 올려 논란이 됨.
- 처형(아내의 자매)들의 불법행위 변명, 서자 황중생을 집안에 드나들게 하다가 중죄를 짓자 "내 아들이 아니다"라고 부인한 일 등 집안 관리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있음.
5. 기타 위기 및 불미스러운 일화
- 1430년, 감목관 태석균의 죄를 완화해달라며 사적으로 형조에 부탁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됨.
- 세종 13년, 교하현감에게 관의 둔전을 달라고 요청해 얻어냈다가 망신을 당함.
- 박포의 아내와의 간통 의혹, 박용의 아내에게 말을 뇌물로 받은 일 등 사생활 관련 논란도 실록에 언급됨.
- 실록에는 황희가 청렴하지 못했고, 집안 관리(제가)에 단점이 있었다는 평가가 남아 있음.
6. 실록 기록과 후대 평가
- 실록에는 황희의 여러 스캔들과 비리, 가족 문제 등이 기록돼 있으나, 일부는 당시 사초(기록자)의 과장 또는 허위라는 반론도 있음.
-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희는 조선 최고 재상 중 한 명으로, 탁월한 조정능력과 국정 운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음.